2014년 1월 19일 일요일

시대의 풍운아 장쉐량(張學良)의 옛집 : 장씨수부(張氏帥府)


중국 심양(瀋陽) 청나라 고궁의 남쪽에는 
20세기 초 이 지역의 군벌이었던 
장쉐량(張學良:장학량)의 옛집이 남아있습니다. 

장쉐량, 그는 중국(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영웅이고 
대만(중화민국)에서는 변절자로 이해되는 인물입니다. 



그가 살았던 저택의 입구입니다. 



△ 관람도

그의 저택은 장씨수부(張氏帥府)라고 불리는데, 
그 말은 장 장군의 저택이라는 뜻입니다. 


△ 관람 안내



간단히 장씨수부에 대해서 말씀드리자면, 


둥베이 지방의 군벌이었던 장작림과 장학량 부자가 살았던 관저 겸 사택이다. 1914년에 장작림이 세웠으며 이후에도 증축을 거치면서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장씨수부(张氏师府)가 유명한 관광지가 되어 박물관으로 바뀐 것은 장씨 부자가 중국 근현대사에 큰 획을 그었기 때문이다. 일본의 배신으로 의도적인 철도 폭파 사고에 휘말린 아버지 장작림은 목숨을 잃게 되었고, 아들 장학량은 일본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올랐다. 장학량은 결국 시안사변을 일으키고 장제스(蔣介石)로부터 제2차 국공합작을 이끌어내 중국 땅에서 일본을 몰아내는 일련의 과정에 일조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알고 본다면 장씨수부박물관을 둘러보는 재미가 배가될 것이다. 내부에는 충신이라 칭송받는 장학량의 업적을 다룬 자료가 중점적으로 전시되어 있다. 그러나 중국 역사에 관심이 없어도 화려하고 다양한 건물을 둘러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총 면적 27,600㎡의 부지는 동원, 중원, 서원과 원외 구역으로 조성되어 있고 구역에 따라 건축양식이 달라 중국의 전통적인 분위기뿐만 아니라 유럽, 일본식 등 여러 가지 건축양식이 혼재되어 있다. ‘전국우수근대건축’으로 지정된 바 있으며, 1988년에 박물관이 지어져서 각종 전람회가 열리기도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장씨수부박물관 [Former residence museum of Zhang Xueliang] (저스트 고(Just go))

그렇군요.. 

이 저택은 1914년에 장쉐량의 아버지인 장쭤린이 지었네요. 
1914년이면, 이미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고 
쑨원의 신해혁명이 일어난지 2년이 되는 해입니다. 

청조는 무너지고 각지에서 군벌이 일어나 중화민국과 알력을 일으키고 있을 때입니다. 

그 중 동북지역을 거점으로 일어난 

장쭤린은 거의 이 지역의 '왕'적인 존재였다고 합니다

특히 그의 성장의 배후에는 만주에 있던 일본 관동군의 지원이 있었는데, 

그는 이 때문에 친일적인 인물로 평가되기도 합니다만 

결과적으로는 그가 장제스에게 밀리게 되자, 

일본군은 장제스와 맞서던 장쭤린의 이용가치가 없어졌다고 판단하여 

열차폭발사고를 일으켜 그를 죽이고 맙니다. 
(장작림 폭사사건, 1928)

참고로 장쭤린이 군인이 된 계기는 
젊은 시절 사람을 죽이고 조선으로 도망쳐서 청군에 입대했던 것이라고 하네요

참 재미있는 이야기입니다. 




아무튼 당시 동북 지역의 왕이나 마찬가지였던 장쭤린의 저택이니 만큼

개인 거주지였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총통부와 같은 역할도 했던 것 같습니다. 


안에 전시된 마네킹들은 당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네요. 


사무를 보고 있는 장쭤린인지 모르겠습니다. 


이 마차는 장쭤린의 아이들이 학교 등교에 사용했다고 하는 마차이구요. 




이 군인들이 입은 군복은 국민당의 군복입니다. 










저택의 방 중에 2개 방에는 장쉐량에 대한 소개가 전시되고 있습니다. 




당시의 시국도입니다. 
중국을 둘러싸고 곰, 독수리, 사자, 두꺼비 등이 달려들고 있네요. 
교과서에서도 많이 보았던 그림이죠?


일본군과 전투하는 장면입니다. 




당시 중국을 침략하는 외세들 중에서도 가장 위협이 되었던 것은 

일제였던 셈입니다. 




장쉐량은 청년 시절에 기독교 인사들과 교분을 나누었다고 합니다. 




장쉐량의 청년시절 모습입니다. 

당시로서는 상당히 개방적으로 서양 스타일을 받아들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또 자신을 이어 아들이 군인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아버지 장쭤린 밑에서

그는 많은 방황을 했던 것 같습니다. 




                                    특히 난카이(南開) 대학의 장바이링 총장이 
[출처] 蔣介石 연금한 西安사변 주역 張學良장군 회고담|작성자 이사람) 대학 장바이링 총장이 
[출처] 蔣介石 연금한 西安사변 주역 張學良장군 회고담|작성자 이사람) 장바이링(張伯笭)은
봉천(심양)에 강연을 하러 왔을 때, 
장바이링의 연설은 "사람이 희망이다"하는 내용이었고 
이는 장쉐량에게 사상적으로 매우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합니다. 




"나는 군인이 되려고는 꿈도 꾸지 않았다. 나는 사람을 구하는 의사가 되고 싶었다.
결과적으로는 사람을 죽이는 군인이 되고 말았지만 말이다."
(1990년, 장쉐량 인터뷰 중)

그는 자신을 이어 군인이 되었으면 하는 아버지의 바람 대신에
사람을 고치는 의사가 되고 싶었다고 토로합니다. 

하지만 운명은 그를 전장의 한 가운데로 내몰았습니다. 
20세의 나이로 동북군 대대장이 되었으며 
28세에 아버지를 잃고 29세에 동북군 사령관이 되었습니다. 




아버지를 이어 군인으로 명성을 날리던 
20대 시절의 장쉐량의 모습들 


"나는 아직도 나를 괴롭게 하여 눈물까지 흘리게 하는 한 장면을 본 적이 있다. 
나는 한 노인이 땅 바닥에 엎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 우리는 그에게 만두를 던져 주었다. 
그랬더니 그는 흙투성이가 된 만두를 먼지와 함께 먹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나 자신에게 물었다. 
대체 누가 이렇게 만들었는가? 
바로 우리 군인들이다"
(장쉐량 만년의 회고 중)




그가 아버지를 이어 만주의 군권을 넘겨 받은 뒤에는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분노로 인해 
강한 반일 노선을 택하고 
국민당과 연대하게 됩니다. 


"외국인들은 우리 중국인들이 '동양의 병자'라고 생각한다, 
우리들은 끊임없이 체력훈련을 계속하여 
'동양의 병자'라는 타이틀을 벗어버리고 
우리 중화민족을 강하게 해야 할 것이다"
(1936년 4월, 감숙성 운동회에서 장쉐량 연설 중)



1931년 장제스와 그 부인 송미령, 장쉐량과 부인 위펑즈가 나란히 찍은 사진입니다. 

1931년은 9.18 사건(일제가 심양에 철도폭파 사건을 일으켜 침략 점거한 사건)이 일어난 해입니다.



이 때를 기점으로 장쉐량은 심양에 대한 영향력을 잃게 됩니다. 




심양을 침공한 일본군의 모습  




"중국은 반드시 통일 되어야 한다. 
독일과 이탈리아처럼 강한 자가 주축이 되어 국내를 제압한 뒤에 
외세에 대항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은 장제스만이 이러한 자격이 있다. 
그러므로 그가 리더가 되도록 보필하려고 결심했다" 


그는 장제스와 손을 잡은 이후로 
공산당을 소탕하는데 힘을 쏟아야만 했습니다. 
그래야 외세(특히 일본)를 몰아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사람들은 일찍이 내가 저항하지 않는다고 욕했다. 
나는 지금 빨갱이 잡는 임무보다 일본과 싸우는 임무로 바꾸기를 원한다. 
나는 빨갱이를 잡는 희생이 항일에 의한 희생보다 더욱 가치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장학량과 王卓然의 대담 중)



결국 그는 국민당 편에 서서 공산당을 토벌하는 일보다 일제를 몰아내는 일이 더욱 시급하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지금에서 생각해봐도 매우 적절한 판단이었던 것 같네요.




마침내 그는 1936년 4월 공산당인 저우언라이(周恩来)와 비밀회담을 갖고 
내전을 멈추고 항일로 나아갈 것에 협력하기로 했습니다. 




1930년대 일본이 점령해가고 있던 지역은 붉은 색으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중국은 국민당과 공산당이 서로 반목하면서 

전쟁을 이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1936년 12월 장쉐량은 
시안 화청지에서 
장제스를 구금하고 내전을 멈추고 항일전투로 나아갈 것을 요구하는
시안사건을 일으키게 됩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서 
제2차 국공합작이 성사되어 
중국 현대사에 일대 획기가 되었으나 

장쉐량 그 자신에게는 평생에 걸친 연금이 시작되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는 장제스를 구금하여 일종의 반역행위를 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는 모든 지위를 박탈 당하고 10년의 연금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리하여  
위 지도에서 보이는 것처럼 
여러 도시에서의 구금을 거쳐 
마침내 1949년 장제스 국민당의 대륙으로부터의 퇴각과 함께
대만으로 들어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대만으로 들어온 후에도 
장제스가 모든 정권을 잡고 있었으므로
그는 은거의 삶을 살아야했습니다. 


비로소 1990년에야 연금이 해제되었고, 
1995년부터는 동생이 살고 있던 
미국 하와이로 가서 살다가
2001년 노환으로 사망했습니다. 




살아있는 역사였던 그의 말년은 
매우 시시콜콜한 사진들로 꾸며져 있었습니다. 

▲ 말년은 그저 평범한 할아버지였다... 



▲ 장쉐량이 사용하던 쥐 장난감


▲ 생전의 장쉐량과 말년을 함께 했던 두번째 부인 자오이디



말년의 그의 모습을 보고 
만주를 호령하던 젊은 장군의 위풍당당함을 어찌 느낄 수 있을까.




▲ 장쉐량이 중국과 대만에 남긴 관련 유적들 





한편 
장씨수부 저택의 입장권에는 
趙一荻故居와 심양 금융 박물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趙一荻(자오이디:조일적)는 사진의 왼쪽에 보이는 여자로, 
장쉐량의 두번째 부인입니다. 

장쉐량의 본부인은 위펑즈(于鳳至)인데, 
사실 중국에서의 대부분의 공식 활동에는 위펑즈 여사가 함께 했습니다. 

▲ 자오이디가 살았던 집은 장씨수부 바로 근처에 있습니다.

▲ 자오이디 옛집의 내부는 완전히 서양식으로 꾸며져 있습니다 


자오이디는 좋은 가문 출신이며 장쉐량의 총애가 지극했음에도 불구하고 
공식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관계였습니다. 
거주하는 곳까지 장쉐량 저택이 아닌 바깥에 위치하고 있었는데요.
그 이유는 위펑즈가 상당히 자오이디에 대해서 경계심을 갖고 있었던 탓이라고 합니다.  


젊었을 때의 자오이디는 정말 미인입니다. 

장쉐량이 첫눈에 반했던 이유를 알 수 있더군요 ^^



이렇듯 자오이디에 대해서 경계심을 갖고 있던 위펑즈는 
대만에서 연금생활 중이던 1964년에 
장쉐량과 공식 이혼하여 
장쉐량이 자오이디와 합법적인 결혼생활을 할 수 있도록 양보하게 됩니다.  

자오이디는 장쉐량의 말년까지 함께 했구요.
2000년에 자오이디가 사망하고 
2001년에 장쉐량이 101세의 나이로 사망하게 됩니다. 


시대의 풍운아
장쉐량의 이야기 마칩니다. 




참고 : 

1) 장쉐량 회고담 : http://blog.naver.com/les130?Redirect=Log&logNo=80003579417
2) 장쉐량 (네이버 백과)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38541&cid=40942&categoryId=333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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