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2월 31일 화요일

하얼빈 731부대기념관 탐방기

 
 
저는 얼마 전에 하얼빈에 위치한
731부대 유적지 및 기념관에 다녀왔습니다.
 
 
언론을 통해서 비춰지는 일제시대와 식민지의 기억은
사실 늘 고통스러운 것만 강조하고 있지만
역사란 늘상 흑백이 뚜렷이 구분되지 않고
선과 악의 이분법도 적용되지 않는 것이기에 
그 진실의 편린이라도 더듬어 보고자 
이곳을 찾았습니다. 
 
 
하얼빈역 서쪽의 松花江街와 鐵路街 사이의 버스 정류장에서 338, 343 버스를 타고
약 1시간 쯤 달려 新疆大街(신장다지에)에서 내리면 됩니다.
 
 
 

731부대 옛터 분포도 입니다.
붉은색으로 표시된 부분만 현재 남은 건물이고
파란색 부분은 지하 지설 부분만 남아 있는 건물입니다.
 
양 옆으로 기차 선로가 있으며, 기차가 이곳을 지날 때에는
반드시 차창을 가리고 밖을 내다보지 못하게 하였다고 합니다.

가운데 파란색 사각형 건물 바로 밑에 붉은 색 건물 2 동이 보이는데
그것이 현재의 731부대 기념관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 731부대 기념관(舊 731부대 본관 일부인 병기고)


그리고 그 붉은색 건물 직선 아래로 내려오면 붉은색 표시 건물(20번)이 있는데 그것이 731부대 기념관 입구에 있는 아래의 사진 속의 '위생실'입니다.

겨울이라 그런지 입구부터가 상당히 을씨년스럽습니다.


▲ 舊 위생실



▲ 731부대 기념관의 개방시간은 9:00~16:30까지이며, 매표는 15:30까지 가능합니다.
원래 점심시간에 문을 닫았다고 하지만, 이제는 없어졌다고 합니다.
 
 

 

▲ 기념관 앞에 있는 설명입니다.
 
해석하면,, 
 
<중국을 침략한 일본 군의 '제731부대' 유적 소개>
731부대는 당시 일본 최고 통치자의 칙령으로 조직된 특수 부대이다.
이 부대는 1935년부터 하얼빈시 핑팡(平房) 지구에서 생물 무기 연구 및 실험, 생산기지, 일본이 동남아의 전쟁터에서 진행 중인 생물전의 연구 센터로서 기획되어 건립되었다.
소위 '식인 마굴'이라고 불리던 이 기지 안에서, 731부대는 잔혹하게 산 사람을 시험재료로 삼아 세균 무기 연구를 진행했다.
사료에 기재된 것에 근거하면, 거의 1939년에서 1945년까지 희생당한 중국과 외국의 반만항일(反滿抗日) 지사와 무고한 백성은 3000천인에 달하고 있다.
1945년, 일본은 패전하여 투항하였다. 그 잔혹한 죄상을 감추기 위하여, 731부대는 도망 전에 이 곳의 시설물에 대해 대규모의 폭파와 파괴를 진행하였다.
현재, 중점 보존되고 있는 범죄 증거의 유적은 23곳이 여전히 남아 있다.
  

▲ 입구에서 10위안에 오디오 가이드를 빌려 준다.
빌릴 때는 여권을 맡겨야 한다.
한국어, 일본어, 영어, 중국어가 제공된다
 
 
한국어 오디오 가이드는 중국인으로 생각되는 여성의 목소리였는데,
틀린 발음이나 어색한 발음이 많아서 
장시간 설명을 듣기에는 매우 피로했습니다.
 
그러나 한국어 설명 판넬이 없어서
중국어를 모른다면,
오디오 가이드를 빌리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전시는 1차 세계대전의 비참한 결과로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1차 세계대전은 처음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독가스 등의 생화학무기로 인해서
유례없는 인간 역사의 비극이 되고야 맙니다.
 
 
이에 따라 서구 국가에서는 1925년 제네바 의정서(Geneva Protocol)을 통해서
해당국이 적국에 의해 먼저 생화학무기로 공격당하지 않는 한,
먼저 생화학 무기를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도록 하였고,
일본도 당시 이에 조인했습니다.
 
 
 
 
▲ 제네바 의정서(1925)
 
 

 
그러나 초기의 이 의정서는 생화학 무기의 생산, 저장, 이동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았습니다.(이 내용은 731부대 기념관에서 보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시기 일본 역시 생화학 무기를 개발하고 있었습니다.
 
첫번째 생화학 무기의 생산기지는
일본  세토(瀨戶) 내해에 있는 '大久野島(오구노시마)'라는 작은 섬입니다.   

 
이곳에는 1929년 독가스를 생산하기 위한 공장이 들어섰고
일본 국민들에게는 일반 군수공장으로 알려져
이곳에 독가스 제조 공장이 세워질 수 있었습니다.
 
 
 
이곳을 지나는 열차는 반드시 차창을 가리고
밖을 내다보는 것을 엄중히 단속하였다고 합니다.


이 섬은 1930~40년대 일본의 지도에서는 지워져 있는 '비밀의 섬'이었고
이 섬에 대해서는 <一人ひとりの大久野島: 毒ガス工場からの証言>(하나하나의 다이구노시마:독가스 공장으로부터의 증언) 등의 책들을 통해서
일본에서도 인식하고 있는 생화학무기 제조장소이기도 합니다.

 
 
▲ 독가스섬 오구노시마를 다룬 일본책들
 
 
 1988년에는 독가스 전시관도 만들어지고
지금은 휴양지로 변했다고 하니,
나중에 일본 오사카 쪽에 다시 갈 기회가 있다면 꼭 들러야겠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일본 국내에 있던 생화학무기 제조 시설은
1932년 중국 동북지역에 일본의 괴뢰정부 만주국이 세워지면서
중국 전역과 철도로 연결된 중국 동북지역에도 설립되게 됩니다.

 
▲ 만주국 지도
 

 위의 철도 라인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동북지역에서 생산한 화학무기를 철도로 수송해
중국 각지의 전투에서 사용하기에 매우 용이한 이점이 보입니다.
 
물론, 생화학무기의 사용은 명백히 제네바 의정서를 위반하는 행위입니다.
 
 
일본이 중국 곳곳에서 벌인 전투에서 생화학 무기를 사용한 예는
확인된 것만 1800 사례가 됩니다.

 
한 복도 전체가 생화학무기를 사용한 사례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당시 신문기사나 책에 실린 목격담, 증언 들에서 발췌한 것들입니다.





 
일본군인이 발포한 독가스탄에 피해를 입었다는 기사가 가장 많습니다.
 
아직도 중국 내에는 일본군이 쓰고 난 독가스 탄알이 잔류해 있는 사례가 보고 되고 있습니다.
 
 
 
전투시에 불발되어 남겨진 것일 수도 있지만,
 
대부분은 저장용으로 묻어두고 미처 사용하지 못한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 지금까지 중국에서 발견된 일본 화학무기의 분포 지점
 
전후 중국에서 농지 개간 및 도시 개발 와중에
 
이러한 독가스 탄알을 발견했다 접촉되어
 
신체가 불구가 되고 피해를 입은 사례들도 많다고 합니다.

 

▲ 잔류 독가스 탄알로 인해 피해를 입은 중국 주민들의 상황
 
 
특히 농경지와 상수도 등에 미치는 피해는 여전히 심각한 것으로 보이는데
(특히 길림 지역 사례가 심함)
죄 없는 민간인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화학무기의 잔인성은
시간을 뛰어넘어 계속되고 있습니다.
 
 
 

보통 우리는 생체실험으로 악명높은 731부대에 대해서만 알고 있지만,
사실 일본군의 생화학무기 개발과 생산은 상당한 조직적 체계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731부대 : 관동군 세균부대
516부대 : 관동군 화학부대
習志野(나라시노)학교 : 훈련부대
과학연구소 : 연구
독가스 공장 : 제조
 
이렇게 총 5개 조직이 공조하는 체제를 갖추었던 것입니다.
 
 

 
그 중 516부대에 대한 설명입니다.
번역하자면,
 
9.18 사변 후, 일본은 중국 동북을 일본의 화학무기의 중요실험장으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화학무기의 연구와 제조 등을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1937년 8월, 일본 관동군은 흑룡강성 치치하얼시에 기술부를 세우고,
그 화학병기반들에 화학무기의 연구와 실험 및 훈련 등을 맡겼다.
1939년 5월, 화학병기반은 화학부, 즉 관동군 화학부로 편제되어 독립되었고,
대외적으로는 516부대로 불리웠다.
그리고 이것이 일본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던 화학무기 실험과 훈련기지였다.
그 아래에 화학무기를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525부대와 화학무기 실험 진행의 연습대인 526부대가 설치되었다.
 
 
 
 
▲1936년 나라시노학교 졸업 사진
 
 
 
▲ 중국인들을 포박하여 구덩이에 몰아 넣고 독가스를 살포한 뒤
상태를 살펴보고 있는 일본군


 

 
▲ 일본군의 화학무기 실험 중 희생된 중국 민간인의 사례
 
 
 
 
 
▲ 일본군이 중국에서 벌인 화학전의 분포도



 
▲ 당시 일본에서 발간된 잡지들에 보이는 화학전의 모습


 

 
▲ 일본군의 방독 마스크와 방독 군수품들
 
 
 
일본군은 항상 방독 마스크를 휴대해야 했습니다.
 
 
 
중국과의 전투에서 독가스를 사용한다는 것을 숨기기 위해
일본 국내 언론에 대해서도 통제를 가했습니다.
오히려 중국인들이 일본군에 대해서 독가스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 방독면을 쓰고 있는 일본군인들.
'불허(不許)'라는 스탬프가 찍혀있는 것으로 보아
신문 게재 시 검열 과정에서 삭제 된 사진으로 추정됩니다.
 
 
그러나 실제 상황은 그 반대였지요.  
 

 
▲ 잠시 쉬고 있을 때에도 일본군의 곁에는 방독 마스크가 놓여져 있다(左上)
독가스로 죽은 중국인의 얼굴은 흉하게 일그러져 있다(左下)
 
 
 
물론 이 시기 일본 만이 화학무기를 사용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제네바 의정서를 무시하고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역시 화학무기를 전쟁에서 사용했던 적이 있습니다.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이 있었던 20세기 초반은
반칙과 위반, 그리고 힘의 우월만이 용인되었던 시기였던 것일까요.
 
이 시기에 대해서 우리 아시아에서도 깊은 공부를 통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핑팡 특별 군사구역과 731부대>
 
 
하얼빈 핑팡 지역은 1930년대 중반부터 생물무기 군사실험의 기지로 사용되면서
특별 군사구역으로 지정되었습니다.
 
바로 이곳에 731부대가 주둔하게 되면서, 악명높은 생체 실험의 기지가 된 것입니다.


 
▲ 증언에 의해서 그려진 마루타(실험용 인간)의 수용소의 구조
 

 

 
731 부대를 다룬 전시실의 한쪽 벽면에는
1988년에 개봉된 중국영화 '마루타'의 장면들이 재생되고 있었습니다.
 
저는 사실 이 영화를 초등학교 6학년 때,
졸업을 앞 두고 학교에서 매일 영화나 보던 시절에
담임 선생님께서 틀어주셔서 본 기억이 있습니다.
 
당시만 해도 야한 영화만 아니면
관람 등급이 따로 없었는지 의문이지만
 
약 20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 잔인한 장면 장면들을 매우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냉동된 팔을 뜨거운 물에 담그거나
산 채로 해부하고
투명한 압력실에 넣어 사람을 터져 죽게 하는 것 등..
 
 
▲ 마루타의 해부 장면
 
 
731부대 기념관에서 다시 보는 이 영화는
실제 벌어졌던 끔찍한 생체 실험을 결코 과장한 것이 아니었구나하는
괴상한 안도감을 제게 주었습니다.
 
관람객들도 그 영화가 재생되는 스크린 앞에서
한참이나 발걸음을 떼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었지만
이들 사이에는
놀람의 비명도, 비난의 욕설도, 한마디 대화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잔인한 장면이지만 고개를 돌리고 외면하는 이들도 없었습니다.
 
그 전시실 안의 무거운 침묵과 공기로부터 내 피부로 전해지는 비통(悲痛)은
이 글을 쓰는 지금까지도 여전히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일본에 대한 분노감이 아니었습니다.
 
한 줄의 글로는 설명할 수 없는 만감이 교차하는 괴로움,
한자로는 '비통(悲痛)'이 가장 적합할 것 같습니다.
 
아직도 제가 느낀 그때의 감정,
그리고 당시 전시실 안을 가득 메우고 있던
무거운 침묵의 정체는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 어린 아이 표본을 만들려고 하는 일본군의관이 중국인 어머니에게서 아이를 빼앗고 있다.
 
 

 
 
▲ 생존자 및 목격자들의 증언
 
 
 
중국 정부에서는 당시 731부대의 생존자들과 목격자(부역자)들이 생존해 있던 90년대에
이들에게서 증언을 받았으며
 
이들이 대부분 문맹이었으므로 대필을 한 경우가 많아
추후에 일본과의 소송을 위해서 공증까지 받아두었다고 합니다.
 
현재 이들은 대다수 사망하였습니다.
 
읽다보니 조선인인 듯한 분도 있었는데, 뒷부분 서류가 잘려있어서 확실치는 않습니다.
 
 
살아있는 인간을 대상으로 한 일본군의 생체 실험은
 
731부대에서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하얼빈에서 더욱 북쪽에 있는 안다(安达)에서는 수많은 도자기 파편이 발견되었습니다.
 
이것은 도자기로 된 폭탄의 잔해입니다.
 
▲ 도자기 폭탄
 
 

 
일본군 증언에 따르면
 
중국인 포로들을 십자가에 묶어 동그랗게 세워놓고
 
머리와 가슴에는 철제 방어구를 씌워 즉사하는 것을 방지한 뒤에
 
하늘에서 전투기가 도자기 폭탄을 쏘아
 
그 치명상 정도를 실험했다고 합니다.
 
 
 
그 일본군의 증언에 따르면
 
실험대상자인 중국인들은
 
모두 자원해서 실험 대상자가 된 것으로 교육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한 번은 실험 대상자들이 묶인 끈을 풀고 탈출하는 바람에
 
도망가는 실험대상자들을 총으로 쏴죽이고
 
탱크로 전원을 밀어서 죽여버렸다고 합니다.   
 
 
 
 
▲ 생체실험에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여러 도구들  
 
 
 
 
 
 
 
<일본군의 참회>
 
 
 

 
 

 
 

당시 731부대에서 근무했던 군의관과 병사, 그리고 운송업자들 중 일부는
말년이 되어 본인들이 중국에서 저지른 잔인한 행위에 대해서 참회하여
적극적으로 그 행위의 전모를 언론과 학자들에게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 731부대의 마루타 운송을 맡았던 일본인 증언자는
자신들이 시내에 나갈 때에는 변복을 했으며
차량의 번호도 수시로 바꿔 달아 세간의 이목을 끌지 않으려고 했다고 증언했다.



그들 중 일부는 본인이 간직하고 있던 731부대 관련 유물을 기념관에 기증한 이도 있고,

직접 목격한 시설을 그림으로 그리고 증언을 보태어 생체 실험의 비윤리성을 뒷받침하기도 하였으며

다시 731부대 유적과 자신들이 패퇴하면서 마루타들을 처분하였다고 하는 송화강변을 찾아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기도를 했던 일본인도 있습니다.



이들이 참회를 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한편으로 이들에게 큰 용기를 내어야 하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그 당시 일본 제국이 파쇼로 치달았던 그 전쟁은 이웃나라에게도 재앙이었지만,
본국의 국민들 역시 평생 지우지 못할 악몽 속으로 몰아넣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731부대는 결국 어떻게 되었을까요.

 
여기에 한 장의 도표가 있습니다.
 
가운데에는 731부대가 있고,
왼쪽에 소련, 오른쪽이 미국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해
731부대는 모든 실험 결과를 미국에게 넘겨주고
그 책임자들은 전범재판에 회부되지 않게 됩니다.
 
소련 역시 2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으로서
일본으로부터 실험 결과를 얻고자 했지만
이미 731부대의 사령탑은 조선을 거쳐 일본으로 도주한 뒤였습니다.  
 
▲ 731부대의 총사령관 이시이 시로(1892-1959)
교토 제국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유럽으로 유학하여 세균전의 가치를 알게 되었으며
731부대의 수장으로서 생체실험을 지시한 장본인 


 
이 같은 사실은
2007년 미국기록관리국(The U.S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에서 공개한 십만 페이지에 달하는 일본제국의 전쟁 범죄보고서를 통해 밝혀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에는 전보, 사진, 일기, 신문기사 등이 포함된 포괄적 정보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1931년부터 1951년간 형성된 것이었습니다.  
 
이 중에는 731부대의 대장이었던 이시이 시로가 미국에 생체실험 결과보고서를 건네고
그 조건으로 전범 재판에 회부되지 않았다는 내용도 기록되어 있어서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 결과보고서는 1500여매에 달하며
731부대에서 생체 실험을 진행했다는
가장 명확한 증거자료가 되었습니다.
 

 


▲ 이시이 시로의 실험 결과 보고서들
 

제게는 이 자료가 결국 미국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다는 것이 매우 충격적이었습니다.
 
현재까지 동아시아 판도에 가장 강력하게 힘을 행사하는 미국,
 
전후 일본이 이웃국가에 과거사를 반성하는 데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는 계기가 되었던 미국의 일방주의 등이 동시에 생각나면서  
 
우리의 우방이라는 미국의 두 얼굴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또한 일신(一身)의 안위를 위해서 실험 보고서를 유출한 이시이 시로는
 
일본의 입장에서는 매국노나 다름 없는 인간일 것이며,
 
잔인한 실험을 통해서 일본군 병사들과 부역자들의 인간성을 말살하고
 
무고한 중국인 및 외국인들을 잔인하게 희생시킨 그 잔악성은 결코 용서받지 못할 것입니다.
 
패전 후 일본으로 도망쳐 들어갔다지만,
 
67세의 일기로 사망할 때까지 편안하게 살았는지가 의문인
 
천인공노(天人共怒)할 전쟁 범죄자인 것입니다.

 
그에 대한 평도 머리는 명석하나 매우 이기적이고 교활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횡령 혐의로 인해 731부대에 발령 받은 바 있음)
 
 
또 하나 흥미로운 부분은,
 
이 731부대가 일본 최고통치자의 칙령으로 조직되었으며 일왕 직속 부대였다는 부분입니다.
 
일본 최고통치자는 다름아닌 일본 천황 히로히토였습니다.
 
그가 731부대를 창설하는데 직접적 지원을 했다는 근거이자
 
그가 이 부대의 목적을 알고 있었다는 뜻이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로히트는 전범으로 처리되지 않았습니다.
 
 
731부대의 창설을 지시하고 모든 실험을 통솔했던 두 사람의 전쟁 범죄자를
 
우리 역사는 모두 놓친 셈입니다. 

 

 
전시관을 다 둘러보면
다음과 같이 지금까지 확인된 희생자들의 명패가 걸려있는 복도를 지나게 됩니다.
 
복도는 중간에 막혀있는데,
이는 731부대가 퇴각하면서 건물을 폭파하여 끊어진 것이라고 하네요.
 
 

▲ 밖에서 본 건물이 끊어진 부분
 
 
야외에는 731부대의 다른 유적들이
마치 마루타들의 울부짖음 속에서 시간이 멈춘 듯
처연히 눈보라를 맞고 서 있습니다.
 





 
 
인간의 잔학성은 어디에서 힘을 얻는 것일까요.
 
전쟁은 이제부터 전쟁입니다라고 시작되지 않습니다.
 
점점 전쟁 속으로 미쳐 가는 것입니다.
 
전쟁의 근저에는 세뇌 교육을 통한 개인의 비판성 거세와 민족 우월성의 강조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역사를 다시는 되풀이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 참고 자료
 
 
 
제네바 의정서(위키백과) : http://en.wikipedia.org/wiki/Geneva_Protocol
 
오쿠노시마 독가스섬(개인 블로그) : http://aniry.com/100139052048
 
 
  
 

댓글 1개:

  1. 저도 독립기념관에서 이시이 시로에 관한 것과 마루타 영화 관람을 할수있었어요.. 진짜 잔인하더라고요~ 좋은 글 공유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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